DSLR을 포기하고 후지필름 X100F를 택하다
원래 나는 거의 SLR 예찬론자였다. 화질이야 미러리스, 풀프레임 디카 등 DSLR에 견줄만한 제품군이 넘쳐나지만 뛰어난 조작감에 있어서는 단연 DSLR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시절 내내 (심지어 정기고사 날까지도) 어깨에 메고 등교했던 카메라도 캐논에서 출시한 커다란 DSLR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는 DSLR을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여행에 꽤나 큰 부담이 될만큼 육중한 바디와 렌즈들, 렌즈를 교체만 하면 내부에 유입되는 먼지를 보며 조금 더 편하게 사진에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다.
물론 크기와 먼지유입 이슈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평소에 필름카메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기에 디자인이라도 클래식한 바디를 써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고, 스티브 맥커리의 라이카처럼 목에 메고다닐 수 있는 카메라를 원하기도 했다. 한 손이 카메라에 묶여있으면 아무래도 번거로우니...
그리고 무엇보다 바디가 작으면 찍히는 모델이 부담을 덜 가져서 조금 더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내가 평소에 찍는 사람들은 전문 모델이 아니므로 거대한 백통 렌즈를 들이댈 때와 폰카로 찍을 때의 표정 변화가 꽤 있다. 당연히 카메라가 작을수록 부담도 덜 느끼고 표정도 자연스러운데, 스마트폰보다는 좀 크더라도 DSLR처럼 무시무시하지만 않으면 피사체가 더 자연스럽게 촬영에 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검색을 시작했다. 뷰파인더가 존재하며, 편리한 ISO/셔터스피드/조리개 조작계를 가지고 있고, RAW 포맷을 지원하며, APS-C 사이즈 이상의 센서를 가진, 보통의 DSLR보다 훨씬 컴팩트한 카메라. 의외로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카메라가 많이 없다. 처음에 내가 본 모델은 라이카 Q였다. 특히 이놈은 풀프레임 센서와 주미룩스 렌즈로 높은 점수를 얻었지만 가격이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좀 들더라. 그것도 그렇고 X100F의 하이브리드 뷰파인더, ISO 다이얼을 내장한 셔터스피드 다이얼, 후지필름의 RAF 포맷이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소니 RX1은 디자인에서 아웃!ㅋㅋ)
아무튼 그렇게 오랜 기간 이 카메라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드디어 물건을 받게 되었다. 이 카메라를 만지작거린지 오늘로 사흘 째인데, 내가 이 카메라에 기대했던 점 중 일부는 들어맞고 일부는 빗나간 것 같다.
우선 조작계. 내가 쓰던 캐논 DSLR과 완전히 다르게 조리개링, 셔터스피드/ISO 다이얼이 직관적으로 노출되어있다. 불편하진 않지만, 생각만큼 편하지도 않다.
우선 조리개링. 조작감은 부드럽게 딱딱 끊기지만 바디에 너무 붙어있어서 툭하면 그 앞에 있는 포커스링을 건드리게 된다. 다만 이건 렌즈를 얇게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사진상 렌즈가 꽤 두꺼워보이지만 실제 렌즈는 포커스링 바로 앞까지고, 그 위로는 어답터와 필터, 후드가 자리잡고있다. 조리개링 자체에 달려있는 두 개의 작은 그립이 꽤 쓸만해서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셔터스피드 다이얼은 확실히 한 손가락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뻑뻑하다. 검지와 엄지를 둘 다 써야하며, ISO 다이얼도 위로 들어서 돌리려면 두 손가락이 필요하다. (한 쪽만 들어선 안 돌아간다.) 직관적인 걸 떠나서 뷰파인더에 눈을 댄 상태로 조절하는게 불편하니 이건 치명적인 단점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나처럼 무조건 매뉴얼 모드르 쓰는 사람들에게는)
대신, 평범한 DSLR 바디처럼 앞뒤로 달려있는 다이얼을 이용해 셔터스피드를 조작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 멋은 좀 떨어지지만 더 편한 방법이 존재하니 다행이다.
요약하면 직관적이고 클래식한 멋이 있지만 보기보다 불편한 다이얼. 그래도 나는 이 기본 다이얼에 적응해보려 한다. 일단 익숙해지면 이만큼 멋있는 것도 없을 것 같아서ㅎㅎ
다음으로 이 하이브리드 뷰파인더. 이건 정말 대만족이다. OVF, EVF, 혼합형 셋 다 아주 훌륭하다. 특히 OVF의 경우 독특한 방식으로 목측식 구조의 단점을 극복하는데 매우 쓰기 편한 것 같다. 시야도 기본 프레임보다 훨씬 넓고. 다만 접사 등 시차가 큰 촬영을 할 경우에는 포커스 문제 때문에 아무래도 전자식 뷰파인더를 쓰는 편이 낫다. 렌즈 옆에 붙어있는 레버로 빠르게 뷰파인더 모드 사이를 왔다갔다 할 수 있어서 정말 편하다.
2/23 후지논 렌즈가 붙어있는데,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화질도 소문대로 뛰어나고, 환산 화각도 내가 가장 많이 쓰던 35mm이고, 크기가 예술이다. 캐논 팬케익 렌즈들보다도 얇으니 뭐... 접사 최대개방시 너무 소프트해지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붙박이라 더이상 먼지걱정 할 일 없는게 최고! 눈에 불을 켜고 보니 아주 작은 먼지가 내부에 하나 보이긴 하는데 부처의 마음으로 신경 끄기로 했다. 어차피 이미지에 나오지도 않으니ㅋㅋ 후지 일부 제품군에 QC 문제가 있다고 한다. 어딜가나 뽑기는 존재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아, 그리고 리프셔터(렌즈셔터)를 써서 셔터가 렌즈 안에 있다. 당연히 쥐죽은듯이 조용하니 SLR의 '찰카닥' 소리를 기대하면 안 된다. 실망할 수 있지만 또 나름 중형 카메라에 쓰이고 진동도 적은 고급 셔터라고 생각하면 느낌이 달라질지도?
참고로 필터를 장착하려면 어답터/후드 세트를 구입해야하는데, 정품은 10만원이 넘는다. 괘씸해서 4만원도 안 하는 호환품을 샀는데 다들 정품인 줄 안다.
여담이지만 설정이 엄청 복잡하다. 매뉴얼이 200페이지에 육박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거의 열 개에 달하는 평션 버튼도 하나하나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고, OVF/EVF에 표시되는 수십가지 기능도 하나하나 고를 수 있고, 후지가 자랑하는 필름 시뮬레이션 포함 온갖 자잘한 기능이 다 들어가있다. 처음에 설정하기가 좀 번거롭긴 한데 날잡고 세팅해놓으면 정말 나만의 카메라로 만들 수 있는건 큰 장점이다.
아, 화질 이야기를 안 한 것 같은데 APS-C 센서임에도 내가 쓰던 풀프레임 DSLR과 화질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DR이 넓어서 그런지 RAW파일 하나가 50MB 정도 한다. 그만큼 관용도도 뛰어난 것 같고, 포토샵에서 이후에 후지필름의 다양한 필름 시뮬레이션을 입힐 수 있는 점도 꽤 재밌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배터리가 아주 조금 아쉽다. 몇시간동안 이것저것 설정하느라 그런 것 같긴 한데 컷수로 치면 공식 스펙의 절반 정도밖에 못 찍었다. 대신 스마트폰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마이크로 USB 단자로 충전할 수 있는건 좋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만듦새는 최상급이고, 크기에 비해 살짝 묵직한 것도 마음에 든다. 목에 걸고다닐 수 있는 작은 사이즈도 너무 만족스럽고, 확실히 찍히는 사람이 부담을 덜 느끼는게 보인다. 클래식한 디자인이 은근히 사람들 눈길을 끄는 것도 좋고ㅋㅋ
적응만 하면 크기, 성능, 조작감, 디자인을 모두 잡은 최고의 바디가 될 것 같다. 열심히 굴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