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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귀족 연필의 개성있는 해석: 그라폰 파버카스텔 기로쉐 펜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필기구 광이었다. 연필, 샤프, 볼펜, 수성펜, 만년필... 할 것 없이 엄청난 돈을 써가며 거대한 콜렉션을 만들었다. 유명한 필기구 회사의 설립 연도, 파버카스텔의 경우 역대 회장 이름까지 외우고 있을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정말 그런 병도 없었을 것 같다.

지금은 그때처럼 병적인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필기구에 관심이 많다. 그 중에도 특히 연필과 만년필을 좋아한다. 오늘 소개할 물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사의 연필 한 자루. 그라폰 파버카스텔(Graf von Faber-Castell)의 기로쉐 펜슬이다. 내가 샀을 때만 해도 한 자루에 만원 가까이 하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는데 오랜만에 인터넷 필기구몰에 들어가보니 가격이 많이 떨어져서 최저가를 찾아보면 자루당 6000원(...)대까지도 나오더라. 단순한 연필임을 생각하면 여전히 황당한 가격이지만, 이 연필이 나에게 주는 만족감을 생각하면 또 그리 미쳤다고 볼 수는 없는 값이다.

그라폰 파버카스텔은 세계적인 필기구 회사 파버카스텔의 고급라인이다. 폭스바겐 그룹의 아우디 브랜드라고 보면 되려나? 가족경영인데 회사 이름부터가 전 회장 중 한 분의 이름이다. 그만큼 걔네 스스로 물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상당히 높은 퀄리티와 가격을 자랑한다.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강남 초딩들의 필기구라고 뉴스에 나와 이슈가 되기도 하지만...

기로쉐 연필에 쓰이는 나무는 여타 파버카스텔 연필과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산 삼나무다. 가볍고 튼튼하고, 어찌보면 가장 무난하지만 믿을 수 있는 소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굴곡이 있는 코팅이 몸통에 기로쉐 무늬를 만들고 있다. 소재는 레진을 레이저로 태운 것 같은데 확실친 않고, 디자인펜슬이랑 250주년 기념연필과 같은 소재를 쓴 것 같긴 하다. 고급스럽지만 같은 회사의 데스크펜슬처럼 너무 중후하진 않다. 그라폰이 그렇게 좋아하는 은 띠도 없고, 기로쉐 무늬만으로 세련되게 승부한다. 덕분에 평범한 학생의 필기 노트에도 잘 어울리고, CEO의 수첩에도 잘 어울린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가격을 떠나서 데스크펜슬보다 기로쉐 펜슬을 더 좋아한다.

땀이 많이 나는 사람도 미끄러짐 없이 쓸 수 있고, 두께도 걔네 대표모델 카스텔 9000보다 1mm 두꺼운 8mm라 손에 꽉 차는 안정적인 그립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무게는 깃털같은 3g.

사실 이걸 산지 거진 5년이 넘었다. 대충 굴러다녔는데도 프린팅이 이정도면 꽤나 양호한 수준 아닌가. 품질 하나는 정말 인정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마감도 뛰어나지만 연필 회사의 진짜 기술은 연필을 깎아봤을 때 드러난다. 편심(심 축이 살짝 한 쪽으로 기울어 나무와 흑연의 경계가 일정하지 않고 들쑥날쑥한 경우) 현상이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필을 생산한 회사답다. (스테들러 미안... 비공식적으론 너네가 가장 오래됐어!)

그라폰 파버카스텔 연필들은 아무래도 주 사용층이 좀 나이가 있는, 혹은 필기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사람들이다보니 흑연 경도는 B 하나밖에 없다. 파버카스텔의 연필은 다른 회사의 연필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조금 더 연하고 단단한 경향이 있어서 타사 기준으로 HB~F 정도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나는 파버카스텔의 F 심을 선호하는데 그에 비해 기로쉐는 살짝 더 진하고 물러서 좀 아쉽다. 물론 기술이 뛰어나서 그런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다른 연필보다 닳는 속도는 더 느리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연필 선물을 많이 하는데 이 연필도 참 선물용으로 적합한 연필이다. 기능이나 마감은 말할 것도 없지만 색깔도 참 잘 뽑은 것 같다. 내가 샀을 때는 밤색, 검은색 두 개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번 오렌지, 일렉트릭 핑크, 터키, 브라운, 블랙 이렇게 다섯가지 색깔로 나오더라. 다들 하나같이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컬러. 요즘은 3개 묶음으로 예쁘게 포장해서 팔기도 하더라.

맨날 볼펜만 만지작거리다가 오랜만에 사각사각 하는 연필만의 감촉을 느껴보고싶다면 당장 인터넷으로 몇자루 주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