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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편한 아날로그: 라미 cp 1

만년필은 연필과 함께 아직도 널리 쓰이는 필기구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연필은 18세기 후반, 만년필은 1884년 발명) 연필이야 실용성, 표현력 측면에서 다른 필기구가 따라오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만년필은 왜??

비싸고 관리도 어려운 만년필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에는 반드시 클래식함이 포함될 것이다. 흔히들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하는데 차가운 펜촉이 우둘투둘한 종이를 긁으며 내는 소리, 촉감도 환상적이고 몸통에 한가득 담겨있는 잉크가 얇은 관을 통해 스물스물 나와 종이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맛도 일품이다.

뿐만 아니라 디자인, 펜촉의 종류에 따라 주인의 개성을 한껏 드러낼 수 있고, 쓰면 쓸수록 펜촉 끝 이리듐이 닳아 본인 필기 스타일에 길들여지기 때문에 진정한 나만의 펜으로서의 의미도 충분히 가진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훨씬 편하게 쓸 수 있는 펜들이 널려있어서 만년필은 어느 순간 마니아층의 고급 필기구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일반적인 만년필은 볼펜보다 더 비싸기도 하고.)

나도 한 때 만년필에 미쳐 살았던 덕에 몇자루의 만년필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쓰는 건 이 한 자루밖에 없다. 바로 라미 cp 1 블랙. 아빠가 대학생일 때 엄마한테 선물한 걸 쓰고있었는데 내가 잃어버려서 새로 한 자루 샀다. 평범함에서 묘하게 묻어나오는 고급스러움이 있다. 겉으로 보면 검은 원기둥에 클립 하나 붙어있는 꼴로 단순하지만, 직접 만져보면 황동 배럴과 꽉 찬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스프링 클립에서 느껴지는 견고함이 남다르다. 저래보여도 라미의 대표작 2000을 디자인한 Gerd A. Müller의 디자인이다.

뭐랄까. 이건 분명히 만년필이지만 일반적인 필기에 아주 최적화되어있다. 우선 닙이 스틸이다. 금촉은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지만 유연하고 힘을 주면 잘 휘어져서 필기용으로 그리 적합하진 않다. cp 1 블랙은 라미 (거의) 전 시리즈에 통용되는 스틸닙을 가지고 있다.

촉이 다양한 라인업에 호환되는 것은 굉장히 큰 장점인데 이 부분에 문제가 생겨도 저렴한 가격에 새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면 같은 크기의 금닙으로 교체할 수도 있다. 특히 라미처럼 QC가 개판인 회사에겐 꼭 필요한 부분.

여담이지만 라미는 소재나 전체적인 디자인, 마감만 보면 아주 훌륭한데 기능적으로 그리 뛰어난진 모르겠다. 많은 제품을 사봤지만 샤프는 일제에 훨씬 밀리고, 볼펜(+멀티펜) 개판이고, 수성펜은 그럭저럭. (중성펜에 비하면 훨씬 불편하다) 주 소비층이 학생이 아니라 그런 것 같은데 솔직히 좀 실망스럽긴 하다. 만약 라미 볼펜을 산다면 안에 있는 심은 꼭 다른 회사 제품으로 바꿔라. 널리 통용되는 규격이라 타사 호환 제품이 많다.

만년필은 얘기가 좀 다른데 닙 불량은 어느 회사나 가지고 있는 문제이므로 양품을 기준으로 얘기하면 품질이 썩 훌륭하다. 가성비를 생각하면 더욱. 닙을 구하기도 쉬워서 까다로운 사람들은 제품을 사며 닙을 추가로 두어개 구입해서 그 중 양품을 장착하기도 하는데 정말 민감하지 않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어보인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성능을 떠나 촉의 디자인조차 간결하다. 이건 만년필의 특성상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인데 난 마음에 든다. 멋부리지 않고 고급스럽게 절제된 느낌. 표기도 굵기와 회사명이 전부다. 라미에서 생산하는 가장 얇은 촉은 EF인데 알파벳 계열 문자를 쓰는 국가에서 만들다보니 일제 만년필의 EF와 비교하면 살짝 굵은 편이다. 종이 질에 따라서도 굵기가 천차만별이니 이것저것 연구해보는 것이 좋다.

필기감은 정말 만족스럽다. 딱딱하고 홈이 있는 플라스틱 배럴, 적당한 잉크 흐름, 적당한 닙의 탄성, 서걱거리는 소리 등 모든 부분 하나하나가 만족스럽다. 매트한 질감의 배럴이 보통 펜처럼 얇고 가벼운 것도 장점이다. 대신 모든 만년필이 그렇듯 종이를 좀 탄다. 교과서같은 얇은 코팅지에는 최악이다. 아무래도 살짝 두께가 있고 결이 없는 종이가 좋다. 보통 한국제지 밀크 복사용지나 로디아, 클레르퐁텐에서 제작하는 종이가 많이 쓰인다. 내가 즐겨쓰는건 로디아 N°18(A4, 80g/m^2).

가볍게 끄적거릴 때도 좋다. 흐름이 좋아서 종이에 대충 스치듯 슥슥 해도 끊기지 않고, 스틸닙이라 해도 어느정도 탄성이 있어서 필압을 좀 높이면 굵기 변화가 보이기도 한다. 일단 가볍고 눈에 안 띄어 들고다니기도 좋고.

피스톤 필러가 아닌 카트리지 방식이다. 라미 T10 카트리지가 쓰이는데 구하기도 쉽고 크기도 커서 한 번 끼우면 꽤 오래 쓸 수 있다. 카트리지 끝부분이 살짝 더 얇은데 저기 있는 잉크는 가볍게 톡 쳐야 아래로 내려온다. 잉크를 거의 다 썼을 때 사용자에게 미리 경고하는 기능이라 볼 수 있는데 꽤 괜찮은 발상이다.

마지막으로 이 캡도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많은 디테일을 품고있다. 클립이 눈에 띄는데 스테인리스 스틸을 통으로 깎아 만들었는지 정말 견고하고 묵직하다. 브러쉬 가공되어있어서 흠집이 눈에 안 띄고, 작게 회사 로고도 적혀있다. 사진으로는 안 보이지만 클립 안쪽에 제조국 GERMANY가 크게 새겨져있는데 은근히 기분 좋은 부분. 잘 보면 배럴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뚜껑을 열고닫을 때 생기는 순간적인 압력 변화가 피드(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크류 방식이 아닌 만년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배려랄까.

깔끔한 디자인, 고급스러운 마감과 뛰어난 기능을 만년필이라는 지극히 클래식한 물건에 조화롭게 담아냈다. 가격이 많이 내려 가성비도 나쁘지 않으니 실용적인 만년필을 찾고있다면 관심을 가져봐도 좋을 것 같다.